"조선업의 '조'자만 꺼내도 은행에서 만나주지 않습니다. 직원 급여에 4대 보험료와 전기료까지 돈 나갈 곳은 널렸는데, 사내 유보금은 바닥나고 있어 집을 추가로 잡혀 담보 대출을 받아야 할 판입니다." 지난 27일 부산 강서구 녹산산단에 위치한 STX조선해양 협력업체 대표 A 씨는 다가오는 추석이 두렵다고 하소연했다. 명절에는 임금과 긴급 결제 자금 등 자금 수요가 몰리기 마련이지만 은행의 대출 빗장은 조선 협력사에 굳게 닫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조선업 회생 방안으로 조선기자재업종에 대한 과도한 여신 회수 금지와 금융 지원 등을 금융권에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비웃듯 시중 은행의 '자금줄 죄기'는 한층 노골화되고 있다.
조선기자재업계와 금융권에 따르면 기업 대출에 적극적이었던 한 시중은행은 최근 부산·경남 여신심사 업무 책임자를 서울에서 직접 내려 보냈다. 지역 업체들과의 지연이나 온정주의를 탈피해 대출 심사를 보다 엄격하게 하겠다는 포석으로 보인다. 부산의 한 조선기자재업체 B사 대표는 "기업 담당 직원에게 해왔던 대출 실적 목표제를 아예 폐지한 은행도 있다고 들었다"며 "시중은행이 조선업을 한계산업으로 규정하고 신규 대출 지원을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려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은행권이 차입금 만기 연장을 거부하거나, 턱없이 높은 수준의 대출 금리 인상을 강요하면서 한계 상황에 내몰린 조선 관련 업체들의 유동성 위기를 부채질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만기 도래한 대출금을 관행적으로 연장해주던 은행이 최근 들어서는 원금의 20~30%씩 상환 조건을 내거는 게 예사다. 연 2~3% 수준이던 대출 금리를 9%까지 인상하며 대출금을 회수하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실정.
조선기자재업체 C사의 자금 담당자는 "일감 난에 조선사의 단가 후려치기로 대부분의 조선기자재업체가 원가 이하로 출혈 수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무리한 요구는 회사 문을 닫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울분을 토했다.
정부 대책도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다. 조선기자재업계 지원을 위해 편성한 1조 7000억 원의 추경 예산은 여야 대치로 한 달 넘게 잠만 자고 있고, 2800억 원에 달하는 STX조선 협력사들의 납품 대금 회수도 막막한 형편이다.
이 때문에 조선기자재 업체 연쇄 도산이 소리 소문 없이 현실화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있는 경남 거제 지역에서 올해 폐업한 사내 협력업체는 50곳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달 5일에는 한때 연 매출 1000억 원을 올리던 창원 중견기업 한국공작기계가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여기에 직원 급여를 연체하거나 전기료를 못 내 단전 위기에 몰린 업체도 속출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조선업 불황에 상대적으로 견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업체까지 돈줄이 막혀 부실이 전방위로 퍼질 우려다. 한국노무사회 전영선 부산지부장은 "은행권의 신규 대출 중단과 조선사 어음 할인 거부 사례가 속속 접수되고 있다"며 "자금 융통 길이 막혀 개인 파산이나 폐업을 검토 중인 업체가 부쩍 느는 중"이라고 말했다.